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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년 절반, 춘천교구장을 지낸 장익 주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카테고리 없음 2010. 3. 2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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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 2010년 3월22일 월요일]
    장익주교를 검색하다 보니....문화일보에서 멋진 인터뷰 기사를 읽게됐다. 현재 고민중인 나에게 뼈가 되는 한 말씀을 남겨주셨다. 종교 지도자로 일반인에게 전하고 싶은 삶의 방식을 무엇일까란 질문에 장 주교는 (잠시 망설이다) 그냥 살라. 어느 스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냥 살라니...경쟁시대에 누굴 밟아야 올라갈 수 있는 이 험악한 세상에서....그냥 살라니..장주교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생명이라는 게 모두 나름의 이치가 있다. 벼 이삭을 잡아당긴다고 쌀이 되지 않는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니 인간도 통째로 바뀐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다. 헐떡거리며 뛰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걸어가야지. 변화에 휩쓸리기보다 내면의 중심을 굳건하게 잡고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분방한 세상 속에서도 자신을 고요하게 응시하는 고독이 필요하다."

    다음 링크는 문화일보 김종락 기자가 쓴 인터뷰 전문이다.


    [2010년 3월21일] 천주교인으로써 가슴이 뭉클했다. 어린 시절 첫영성체를 받을 때 장 주교님을 처음 뵈었다. 그때가 아마 내 기억속에는 중학교 3학년 때인 1995년으로 기억된다. 장익 주교가 춘천교구장으로 부임한 것이 1994년이니....시간은 별로 지나지 않아서 였나보다. 주교....성당에서는 대단히 높으신 분이다. 그날 우리는 철원본당을 깨끗히 청소해야 했다. 집 청소도 안하는 내게 가혹한 일이었다. 솔직히 하기 싫었다. 그리고 나서 올해 2010년 3월20일. 장익 주교의 퇴임 감사 미사를 지켜봤다. 그 온화한 미소속에 지난날의 기억이 가물히 기억났다. 그때도 장익 주교님의 표정은 늘 굳어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서운 분이셨다. 어린 나이 주교님은 하늘과 같이 높게만 느껴졌다. 기자가 되고 난 이후 천주교를 담당하게 됐고, 취재를 다니게 됐다. 많이 어려웠다. 내가 지닌 종교였기에.. 이제는 편안하게 장익 주교를 볼 수 있게 돼 기쁘다. 마음이 답답하고 어지러울때면....춘천 실레마을 공소를 찾아 장익 주교를 뵈면 된다. 물론 춘천교구장의 무거운 십자가를 놓으시고도 주교회의에서 한가롭게 가만히 놔두실지는 모르겠지만....꼭 훗날 다시 찾아 뵙고 차나 한잔 마시고 싶다. 아버지 같은 온화의 웃음을 지닌 장익 주교를 말이다.

    장익 십자가 요한 주교는 1933년 11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3년 3월 사제 수품을 받고 1970년 9월에는 서울대교구 정릉본당 주임신부가 됐다. 1976년 서울대교구 비서실장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모셨다. 1978년부터 서강대 종교.신학과 부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1980년대에는 남북 화해와 일치를 위한 활동을 펼치셨다. 1994년 춘천주교로 임명돼 그해 12월 주교 수룸과 춘천주교 착좌식을 가졌다. 1995년에는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96년 10월에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5년 10월 민족화해 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과 그대 11우러 천주교 함흥교구장 서리로 임명된다. 2006년10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으로 선출된다. 2010년 1월 천주교 춘천주교 사의를 표했다. 장면 총리의 아들로도 유명하다.

    16여년간 춘천교구를 이끌어오신 장익 주교를 위한 기도를 끝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모든 믿는 이의 목자요 임금이신 하느님,
    찬히 주님의 일꾼 장익 요한 주교를 
    거룩한 교회의 목자로 세우셨으니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장익 요한 주교가 
    말과 모범으로 산자들을 보살피다가
    맡은 양 무리와 함께
    마침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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