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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라는 그 이름
    카테고리 없음 2013. 9. 22.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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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단데(김상태)야. 김단데 아빠."


    30개월 된 딸이 아빠 이름을 마구 부른다. 뭔 뜻인지도 모르고 내뺃는 말이라 기분이 나쁘지 않다가도 기분이 나쁘다. 하지만 귀엽고 신기하다. 내 아버지도 이런 마음이 들었을까. 긴 추석 연휴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다. 동아일보(2013년 9월22일자 13면)에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책이 소개됐다. 책 소개보단 우정렬 기자의 경험담으로 시작한 앞부분이 맘에 들었다. 명절 연휴 차를 끌고 고향을 찾은 아들의 차를 슬며시 끌고 나가셨던 아버지. 세차와 함께 가득 주유된 차. 


     아버지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 사람(기자)은 차부터 깔끔해야 하는 거다"라는 말씀으로 멋쩍어 하던 아들(우정렬 기자)을 달랬다. 아버지라는 그 이름, 다시 한번 가슴에 담아본다.



    >아버지에 관한 추억, 못 배웠지만 지혜로운 분

    2000년 4월 입대 하루전날 필자는 아버지를 찾았다. 왜 하필 모내기에 입대를 해서 바쁜 아버지를 더 심난하게 했을까. 아버지는 근처 갈비집으로 아들을 데려갔다. 말없이 소주를 드시면서 몸 건강히 잘 다녀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고는 "19년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도 많겠지만은 이쯤에서 니 인생을 한번 정리하고 오너라. 군대에서는 혼자 근무하면서 생각할 시간이 많을 거야. 그러면 뭔가 보이겠지"


    아버지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하셨다. 그 시절 대부분이 그랬다. 잘 배우진 못해도 아버지는 아들 인생의 훌륭한 멘토가 된다. 체격은 아버지보다 훌쩍 커버렸지만, 아버지라는 <산[山]>은 아들에게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듬직한 보금자리가 됐다. 철없던 시절 아버지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을 자신했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발끝만큼이라도 따라갈 수 있겠나 싶다. 


    아버지는 이름따라 농사의 <명수>셨다고 한다. 벼농사에서 남들보다 반배 더 많은 수확을 거두시곤 하셨다. 그만큼 숨은 노력은 이루 말하기도 힘들겠지만. 워낙 가진게 없어 술도 얻어마셔야만 했던 아버지. 


    아들 친구 집에서 월세로 살다 "왜 우리집에 왔느냐"는 아들의 말에, 가슴에 대못도 박히셨을테지. 그래서 지금 사는 집을 사셨다는데, 오로지 몸뚱이 하나만으로 아들 두 명을 건강하게 잘 길러내셨다. 물론 어머니와 함께.


    돈은 쫓아가면 더 멀어지고, 돈이 쫓아오게 해야 한다는 말씀.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늘 강조하셨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도, 절근절약의 생활 습관도 아버지께 모두 배웠다.


    이제야 딸 하나, 아들 하나를 얻은 아버지가 된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발톱의 떼정도는 되지 않았나, 스스로 반성해보곤 한다. 자식을 낳고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내 이름을 사정없이 부르는 딸아이를 보면서, 또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도 보지 못하고 일하러 가시는 60대 중반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볼 때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안타까움이 교차된다. 하루라도 손녀손주를 더 보여드리기 위해 연휴 하루 전날 밤 늦게부터 출근하는 날 오전까지 꽉 채워 고향에서 보냈다.


    아직도 아버지는 천하무적의 강철 로봇이라고 생각하지만, 요즘 아버지가 자주 설사를 하시고, 변비까지 생기셔서 걱정이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백, 아버지를 생각하노라면 콧날이 찡해진다. 


    그러고 보니 이번 추석에 아버지를 찍은 사진 하나가 제대로 없다. 에휴~ 난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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